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윤상 유괴 살인 사건 (문단 편집) == 결말 == 재판 결과 주영형은 유괴 살인으로 유죄 판결을 받았으나 나머지 두 여학생에게는 협박편지 작성 가담 등의 범행 일부 동조 혐의만 적용되었다. 이후 주범 주영형은 [[1982년]] [[2월 16일]] 1심 판결과[* 주영형의 사형 선고가 이뤄진 뒤 [[전두환]] 대통령은 또 다시 대국민담화를 통해 "국민 여러분, 아동 유괴 살인 사건에 대해서는 앞으로 무조건 이렇게 조치할 것입니다"라는 살벌한 말을 남기게 된다.] 동년 [[7월 9일]][* 2심 사형 선고일인 이날로부터 정확히 1년 뒤 주영형의 사형이 집행된다.] 2심 판결에서도 사형이 선고됐다. 주영형의 사형은 사건 발생 후 2년 10일, 체포 후 358일만인 [[1982년]] [[11월 23일]] 대법원이 상고를 기각함에 따라 확정되었으며[* [[https://casenote.kr/%EB%8C%80%EB%B2%95%EC%9B%90/82%EB%8F%842024|대법원 1982. 11. 23 선고 82도2024 판결]]. 이 대법원 판결은 "감금행위 도중 살인의 고의가 생겨 살인한 경우 감금치사가 아니라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구성한다"는 내용으로 형법 교과서에 오르게 된다.] [[1983년]] [[7월 9일]] [[서대문형무소|서울구치소 내 사형장]]에서 [[교수형]]이 집행됐다. 공범 이 양에게는 1심에서는 징역 10년, 2심에서는 [[징역]] 단기 3년, 장기 5년이 선고되었고 상고가 기각되어 형이 확정되었다. 또 다른 공범 고 양은 1심에서 징역 2년, [[집행유예]] 3년을 선고받았고 이후 항소를 포기하여 역시 형이 확정되었다. 이 양은 1985년 12월 25일을 기해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다. [[https://www.joongang.co.kr/article/1606642|주영형의 최후 진술]] 두 여학생은 형량을 받아들였으나[* 당시에도 "아무리 미성년자라고 해도 유괴 행위 협조, 사체 유기, 협박, 경찰 수사 방해, 사실 은폐 등을 저질렀는데 너무 낮은 형량을 주는 게 아니냐"는 비판이 있었고 논란이 많았다고 한다.] 주영형은 사형을 면하려고 [[재심]]을 여러 번 청구했다. 당시 현장 형사반장의 증언에 의하면 현장 검증을 하러 갈 때 '''"형사님 나 (출소해서) [[1988 서울 올림픽|88올림픽]]은 볼 수 있을까요"'''라는 어이없는 [[망언]]을 하였다고 한다. 이후에도 자신이 죽인 게 아니라 아이가 죽어 있었다고 변명하고 재판장에서 "[[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|죄는 미워해도 사람은 미워하지 말라]]는 말이 있다"며 자신을 선처하라고 외쳤다. 그러나 기각되었다. 그나마 수감 중에는 종교에 귀의해서 변한 모습을 보였고 모범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기도 했다. [[1983년]] [[부활절]]([[4월 3일]])에는 문장식 목사에게 세례도 받았으며 세례식 중 참회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. 결국 동년 [[7월 9일]]을 기해 [[교수형]]으로 처형되었으며[* 같은 날에는 [[박분례 보험 살인사건]]의 범인 역시 처형되었다.] 사형 집행 전 자신의 눈과 콩팥을 사회에 기증한다고 말했다. 그의 장기는 4명에게 기증되었다. [[신장]]은 당시 46세 회사원과 30세 여성, 안구는 오른쪽 눈을 실명한 50대에게 이식되었다고. 신장 수혜자 중 전자의 아내는 기증자가 누구인지도 모른 채 '우리 가정의 은인인 셈이니 평생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해 주겠다'고 말했으며 이 사실이 언론에 크게 보도되었다고 한다. 사건 이후 1991년 3월 [[경향신문]] 근황기사 등을 종합한 바에 의하면 이윤상 군의 어머니 김해경 씨(1941년생)는 남편과 함께 1982년에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82020400239110016&editNo=1&printCount=1&publishDate=1982-02-04&officeId=00023&pageNo=10&printNo=18717&publishType=00010|'윤상장학회'를 만들어]] 지체장애 학생들을 물심양면으로 돕는 한편 수기집 [[https://nl.go.kr/NL/contents/search.do?srchTarget=total&pageNum=1&pageSize=10&kwd=%EB%B9%84%EC%A0%95%EC%9D%B4%EC%96%B4%EB%9D%BC#viewKey=14508&viewType=AH1&category=%EB%8F%84%EC%84%9C&pageIdx=1|<비정이어라>]]를 냈지만 [[췌장암]]에 걸려 투병하면서 1985년 2월 14일 천주교로 귀의했고 3월 12일에 [[https://newslibrary.naver.com/viewer/index.nhn?articleId=1985031400329207013&editNo=2&printCount=1&publishDate=1985-03-14&officeId=00032&pageNo=7&printNo=12141&publishType=00020|아들 곁으로 갔다.]] 향년 45세. 아버지 이정식 씨(1940년생)는 이듬해 재혼하여 1986년과 1988년에 아들을 얻었으나 [[대인기피증]]에 시달렸다고 한다. 윤상 군의 누나 이연수 씨[* 1966년 1월 16일 생.]는 [[중앙대학교]] 수학과에 진학해 교사가 되었다. 한편 이 양은 1985년 12월을 기해 성탄절 특사로 석방되었으며 주영형의 부인[* 1957년생]은 사건이 터진 후 주영형과의 인연을 끊고 아들들을 주영형의 부모(자신의 시부모)에게 맡겨 둔 뒤 잠적했으며 주영형의 작은아들은 어린 나이에 병으로 요절했고 큰아들은 조부모 손에서 성장했다고 하는데 이후의 근황은 알려진 바가 없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